돈버는 이야기

강남 부동산 개발의 역사 3가지 포인트

30대 퇴사남 생존기 2020. 6. 2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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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과거엔 강북이 서울의 중심이었다.
  • 전쟁으로 도심을 분산해야 했다.
  • 강남은 개발하기에 최적의 땅이었다.

강남 개발의 배경

 

 

최초의 서울은 지금보다 작았다. 경기도의 여러 지역들이 서울로 편입되어 지금의 서울을 이뤘다. 과거 1960년대 당시 작았던 서울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전국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몰렸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은 강북지역에 밀집되어 있어서 도시과밀화 상태였으며, 전쟁이 가까웠던 시기라 안보의 문제도 컸었다. 한국전쟁 때 한강을 건너지 못해서 겪은 고통이 남아있던 시기였고, 주요 시설들이 한 곳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대책

 

 

리스크를 헷지하기 위해 정부는 두 가지 대안을 내왔다. 첫 번째는 행정수도 이전하기였고, 두 번째는 서울을 유지하되 도심기능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방법이 채택이 되었으며, 강남 개발이 초석이 되었다. 남북 분단이 지역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만약 전쟁이 없었다면 고양이나 파주처럼 좀 더 북쪽이 핵심지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강남인 이유

 

 

당시 강남은 지대가 낮아 홍수가 잘나던 단점이 있어 개발이 더디던 곳이었지만 여러 장점이 있던 땅이었다.

 

1. 개발할 땅이 크다

땅이 평평하고 커서 개발할 곳이 많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서울의 핵심지역이었던 사대문 안쪽이 총 500만 평이었는데, 과거 기준 강남 즉 반포에서 삼성까지의 땅만 800만평이 넘는 넓은 땅이었다.

 

2. 구도심과 가까움

중간에 한강이라는 큰 장벽이 있었지만, 이를 연결만하면 충분한 인접성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정치적으로 큰 결단을 하기 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집중해서 개발계획을 냈고, 정부에서도 민간기업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개발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당시 박정희 정권은 많은 정치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3. 자동차 시대

당시 강남은 교통이 매우 불편했고 빈민층이 사는 대표 지역이었다. 이후 70년대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식을 시작으로 자동차 수는 급격하게 늘었다. 과거에 비해 전국적으로 자동차 수가 160배가 늘었고, 동시에 강남 개발이 결정되었다. 강남에 고속터미널이 생기기도 하며 다른 지역보다 자동차 시대의 수혜를 받을 수 있었다.

 

초고속 개발

 

 

개발 전 강남은 강북에 식재료를 공급하던 과수원이나 밭이 많았다. 잠원동은 단무지가 유명했고, 서초동은 화초로 유명한 꽃마을이었다. 압구정은 배나무 과수원, 도곡동은 도라지가 많이 났고, 청담은 많은 물이 흐르던 청숫골이었다. 이랬던 강남이 위와 같은 이유들로 유례없이 빠른 도심개발의 역사를 쓴 것이다. 초고속으로 현대 도시로 바뀌는데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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